항암치료가 끝나면 모든 게 회복될 거라 기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치료가 끝난 지 몇 달이 지나도,
심지어 1년이 넘어도 손발이 저리고
감각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지속되기도 합니다.
“암은 없어졌는데 왜 이 증상만 남아 있는 걸까요?”
많은 분들이 이 질문을 안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 증상의 핵심은 항암제가 신경 자체를 직접 손상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손상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느냐에 따라,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깁니다.
오늘은 항암제 유발 말초신경병증,
즉 항암 후 신경 손상이 왜 지속되는지
그 기전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항암제는 어떻게 신경을 손상시키는가
항암제 중에서도 특히 백금계열, 탁산계열, 빙카알칼로이드 계열은
말초신경에 직접 독성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약물들이 신경에 해를 끼치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경세포 내 미토콘드리아 기능을 방해하는 것,
둘째는 신경 축삭을 따라 영양분과 신호를 전달하는
축삭 수송 체계 자체를 교란하는 것입니다.
신경세포는 세포체에서 만들어진 단백질과 에너지를
축삭을 따라 수십 센티미터 밖 말단까지 보내는 구조입니다.
손발 끝까지 이어지는 신경이 특히 길기 때문에,
이 수송 체계가 무너지면 가장 먼 부위부터 먼저 타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손끝, 발끝부터 저림이 시작되는 겁니다.
이걸 ‘길이 의존적 손상 패턴’이라고 부릅니다.
백금계열 항암제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나쁜 특성을 가집니다.
신경세포체가 모여 있는 후근신경절에 직접 축적되어
세포핵 내 DNA까지 손상을 입힌다는 점입니다.
세포체 자체가 손상되면, 이후 신경이 재생되더라도
정상적인 기능 회복이 훨씬 어려워집니다.
치료가 끝났는데 왜 더 나빠지거나 지속되는 걸까
항암제 투여가 멈춘 뒤에도 증상이 오히려 심해지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를 ‘코스팅 현상’이라고 합니다.
약물이 체내에서 빠져나간 후에도 신경 손상은 계속 진행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후근신경절에 축적된 백금 화합물은
일반 조직에 비해 훨씬 오랫동안 신경 내에 머뭅니다.
혈액에서 약이 사라졌다고 해서 신경 안에서도 사라진 건 아닙니다.
여기에 더해, 이미 손상된 신경 환경은
산화 스트레스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울어집니다.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면서
동시에 세포 독성 물질을 더 많이 만들어냅니다.
신경이 회복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를 만드는 기관이 손상된 상태라는 모순이 생기는 겁니다.
또한 말초신경의 재생 속도 자체가 매우 느립니다.
신경 축삭은 하루에 약 1~3mm 정도 자라는데,
발끝까지 이어지는 신경 경로를 생각하면
회복에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재생이 가능한 환경인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신경 주변의 미세 혈액 순환이 저하되어 있거나,
신경을 감싸는 수초 구조 자체가 무너져 있다면
재생 신호가 정상적으로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결국 증상의 지속 여부는 축삭 손상의 정도만이 아니라,
재생이 일어날 수 있는 내부 환경이 갖춰져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회복이 가능한 신경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것들
모든 항암 후 신경 손상이 동일한 경과를 밟지는 않습니다.
같은 항암제를 같은 용량으로 맞더라도
어떤 분은 6개월 안에 상당히 좋아지고,
어떤 분은 수년이 지나도 저림이 남습니다.
이 차이를 만드는 데는 몇 가지 요소가 작용합니다.
첫째, 기저 신경 상태입니다.
당뇨가 있거나, 이전에도 말초 혈액 순환에 문제가 있었던 분은
신경이 손상 전부터 이미 취약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항암 후 전반적인 영양 상태와 자율신경 기능입니다.
신경 재생에는 산소, 포도당, 특정 비타민류가 꾸준히 공급되어야 하는데,
항암 과정에서 소화 기능이 무너진 분들은 이 공급 자체가 불안정합니다.
셋째, 수면과 스트레스 수준입니다.
이게 신경 손상과 무슨 관련이냐고 의아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면이 부족하면 신경 성장인자 분비가 줄고,
만성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말초 혈관이 수축되어
신경 주변 혈류가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신경 재생에 필요한 환경이 계속 방해받는 겁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소화 기능이 저하되면 영양 공급이 줄고,
영양이 부족하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며,
수면이 부족하면 자율신경 불균형이 심해지고,
자율신경이 불안정하면 말초 혈류가 줄어듭니다.
손발 저림 하나의 증상 뒤에는
이처럼 여러 기능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경 손상 자체만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왜 이 증상이 지속되는지, 왜 어떤 사람은 회복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지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항암 후 몸의 회복은 신경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경이 다시 자랄 수 있는 토양 전체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