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중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업 시간에 조용히 앉아 있지만,
정작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멍하니 있었던 건 아닌데,
머릿속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린 느낌.
조용한 ADHD는 바깥에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래 방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잉행동이 없어서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주의력이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왜 듣고 있는데도 안 들리는지,
그 기전을 살펴보겠습니다.
뇌가 깨어 있는 정도가 일정하지 않을 때
집중하려면 뇌가 적절히 각성된 상태여야 합니다.
너무 졸려도 안 되고,
너무 흥분해도 안 됩니다.
이 각성 수준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뇌 깊숙이 있는데,
조용한 ADHD에서는
이 조절이 불안정합니다.
필요할 때 뇌가 제대로 깨어나지 않습니다.
회의가 시작되면 집중해야 하는데,
뇌는 여전히 멍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본인은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보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쉬어야 할 때
뇌가 과도하게 돌아가면서
잠이 안 오거나, 머릿속이 시끄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불안정한 각성 상태가
조용한 ADHD의 기본 배경입니다.
불필요한 생각을 걸러내지 못할 때
뇌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지금 중요한 것만 골라서 처리해야 합니다.
이걸 선택적 주의력이라고 하는데,
조용한 ADHD에서는 이 필터가 약합니다.
강의를 듣는 중에도 창밖 풍경,
점심 메뉴,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걸러내야 할 생각들이
걸러지지 않고 계속 올라옵니다.
본인은 딴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냥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조용히 앉아 있어도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귀로는 듣지만 뇌가 처리하지 않는 겁니다.
방금 들은 내용이 사라지는 이유
조용한 ADHD가 일상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은
작업기억 문제입니다.
방금 들은 말, 방금 읽은 문장이
몇 초 만에 증발합니다.
상사가 지시한 내용을
자리에 돌아오면 기억이 안 나고,
책을 읽다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게 됩니다.
정보가 단기 저장소에 머무르지 못하고
흘러가 버리는 겁니다.
이건 기억력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성 수준이 불안정하고 선택적 주의력이 약하면,
정보가 애초에 제대로 등록되지 않습니다.
등록이 안 된 정보는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왜 기억력이 이렇게 나쁘지”라고 자책하지만,
실제로는 주의력 문제가
기억 문제처럼 나타나는 겁니다.
조용해서 더 오래 방치되는 문제
과잉행동형 ADHD는 어릴 때부터 눈에 띕니다.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고,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 발견되고
도움을 받을 기회가 생깁니다.
조용한 ADHD는 다릅니다.
겉으로는 얌전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성적이 조금 떨어지거나
멍한 아이로 보일 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본인도 자신이 게으르거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뇌의 각성 시스템과
주의력 필터에 문제가 있는데,
그걸 모르고 수년간
자책하며 살아갑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나도 ADHD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까지 쌓인 자존감 손상이
적지 않습니다.
집중하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
조용한 ADHD를 가진 사람에게
“집중해”라고 말하는 건 효과가 없습니다.
집중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뇌가 집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지 못하는 겁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절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각성 수준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멍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선택적 주의력 필터가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잡념이 끼어듭니다.
이 상태에서 “왜 집중을 못 하냐”고 다그치면
불안과 자책만 커집니다.
불안이 높아지면 각성 시스템은 더 불안정해지고,
주의력은 더 흔들립니다.
경청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딴생각이 흐르는 패턴이
오래됐다면,
노력 부족이 아니라
뇌의 각성 조절과 주의력 필터링 방식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