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도
중요한 발표가 있던 날, 가족과 크게 다툰 날,
유독 위가 뒤집어지는 느낌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약이 효과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위가 그냥 약한 체질인 걸까요?
그 답은 위에 있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들어오는 순간,
뇌가 먼저 반응하고
위는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할 뿐입니다.
위만 달래서는 해결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가 위에 무슨 신호를 보낼까요
뇌는 심리적 위협을 감지하면
즉각적으로 특정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코르티코트로핀 유리 호르몬,
줄여서 CRF라고 불리는 물질입니다.
CRF는 원래 뇌하수체를 자극해
스트레스 대응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물질이 뇌에서 분비되는 순간,
장 신경계로도 신호가 동시에 전달됩니다.
CRF 신호를 받은 위는 빠르게 두 가지 변화를 겪습니다.
하나는 위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
다른 하나는 위산 분비 조절이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위가 천천히 움직이면 음식이 제때 내려가지 않고
더부룩함, 팽만감, 구역감이 생깁니다.
동시에 점막 방어막 기능도 약해져
위산에 취약해지게 되죠.
신경성위염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들이 바로 이 경로로 만들어집니다.
약이 위산을 줄여준다 해도
CRF 신호가 반복되면 위 운동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올라오는 겁니다.
약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
신경성위염에 흔히 쓰이는 약들은
위산을 억제하거나
위 점막을 보호하거나
위 운동을 조절하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이 약들이 효과가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약이 작용하는 자리와
증상을 만드는 자리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CRF는 뇌에서 분비됩니다.
그리고 미주신경이라는 긴 신경 경로를 타고
위장으로 신호를 내려보냅니다.
이 경로는 약이 직접 차단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없는 날에는 약이 잘 듣는 것 같고,
극심한 긴장이나 심리적 압박이 있는 날에는
같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위의 상태는 매일 달라지는 게 아니라
뇌의 신호 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CRF 분비는 실제 스트레스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스트레스를 ‘예상’하거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뇌는 같은 반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일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걱정,
예전에 힘들었던 상황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위는 긴장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결국 신경성위염은 위의 병이기도 하지만
뇌가 위에 보내는 신호의 병이기도 합니다.
위를 보기 전에, 신호의 출발점을 봐야 합니다
약을 먹어도 스트레스받는 날 유독 증상이 심해진다면
그건 약이 부족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뇌에서 위로 이어지는 경로가
반복적으로 활성화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위 점막만 들여다보는 시선으로는
이 경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신경성위염을 제대로 보려면
위가 왜 지금 이 반응을 하는지,
그 신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몸 안의 경로는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